작곡가 윤이상의 작품세계
1994년 9월 1일 독일 베를린의 윤이상 선생 자택에서 유럽 및 독일 주재 한국 특파원과의 회견이 끝난 뒤 이런저런 얘기를 나누고 있을 때 파리에 살고 있는 동양 출신의 한 지인이 찾아왔다. 꾸벅 인사를 한 그는 대뜸 "선생님 드리려고 멸치를 갖고 왔습니다" 라며 종이 꾸러미를 내밀었다.
그 순간 윤이상 선생은 "통영, 통영 멸치!? 아니 이게 정녕 통영 멸치란 말이오?"라고 울음 섞인 외마디 비명을 지르며 벌떡 일어났다. 그의 목소리는 떨렸고 눈은 이내 눈물로 얼룩졌다. 그 지인이 "네, 선생님이 통영여고에서 교편을 잡고 계실 때 제자였던 제 누이가 직접 보낸 것입니다."라고 말할 때, 꿈에도 잊지 못하던 고향, 통영 멸치를 받아 들고 울먹이던 노음악가의 모습에 주변의 특파원들도 모두 숙연해졌다.
- ‘부산일보’ 세계적인 작곡가 고 윤이상 선생님의 기사중에서 -
윤이상 선생님의 고향은 통영입니다. 그 분은 그 먼 독일땅에서 살아오면서 생의 마지막 끝자락을 잡고 계실 때까지 통영 앞바다를 찍은 큰 사진을 벽 한켠에 붙여 놓으셨으며 노후를 통영 바닷가에서 낚시를 즐기며 조용히 지내고 싶다고 말씀하시곤 하셨답니다. 마지막 순간 유언하시기를 "고향인 통영에 묻힐 수 없다면... 차라리 베를린에 남겠다" 라고 하셨다 합니다. 고향은 누구에게나 그리움의 대상이지만 윤이상 선생님, 그 분에게 통영은 어떤 의미에서 큰 그리움의 대상이였을까요?
우리는 윤이상 선생님의 이 말 한마디에서 그 답을 찾을 수가 있습니다. "나는 통영에서 자랐고, 통영에서 그 귀중한 정신적, 정서적인 모든 요소를 내 몸에 지니고 그것을 나의 정신과 예술적 기량에 표현해 나의 평생 작품을 써왔습니다. 구라파(유럽)에 체재하던 38년 동안 나는 한번도 통영을 잊어 본 적이 없습니다. 그 잔잔한 바다, 그 푸른 물색, 가끔 파도가 칠 때도 파도 소리는 나에겐 음악으로 들렸고, 그 잔잔한, 풀을 스쳐가는, 초목을 스쳐가는 바람도 내겐 음악으로 들렸습니다."
통영은 그에게 어머니와 같은 존재였습니다. 멀리 떠난 아들이 어머니를 그리워하는 것처럼 그 분도 그러했나 봅니다. 이제는 세계의 유수한 유명 음악가들을 '통영국제음악제'라는 이름으로 이 작은 마을 통영으로 오게 불러놓고서는 정작 자기자신은 끝내 오지 못하고 그 넓은 통영바다 대신, 향기로운 통영의 향토 대신 한줌의 통영에서 퍼간 흙만으로 통영에 대한 그리움을 달래며 독일 저 먼땅에서 아직도 꿈을 꾸고 계신가봅니다. 나비가 되어 고향으로 향하는 꿈을...
윤이상선생의 묘비문
"윤이상은 고향인 통영에서 퍼 온 흙 한줌과 함께 여기 잠들어 있다."
윤이상은 일제강점기인 1917년 9월 17일 윤기현(尹璂鉉)과 그의 두 번째 부인인 농민출신의 김순달(金順達) 사이에서 장남으로 태어났다. 고향통영은 풍부한 전통문화뿐만이 아니라 일본을 통해 유입되기 시작한 유럽의 신문화가 활발하게 교차하여 공존하던 곳으로 청마 유치환 등 많은 민족적 시인과 예술가들을 배출한 문화적 요지이자, 바다로 둘러싸인 지리적 조건으로 인하여 정치적, 군사적, 상업적 요충지였다.
윤이상은 감수성이 풍부한 유소년시정 통영의 역사와 함께 면면히 이어져 내려온 다채로운 전통문화(유교적인 제사의식, 선비들의 풍류, 유랑극단의 공연, 부유한 친척의 잔치 때마다 들었던 기생들의 노래와 전통악기 연주, 통영 오광대놀이, 무당의 굿, 석가탄신일 미륵산의 연등제, 승려들의 예불소리와 범종소리, 정월 대보름의 다리밟기와 연날리기, 5월 단오제, 어부들의 남도창 등)와 새로이 유입되는 신문화를 온몸으로 호흡하며 성장한다.
다섯 살 때부터 3년간 서당에서 한학을 공부한 윤이상은 여덟 살에 유럽식 교육체계의 통영공립보통학교에 입학한다. 여기서부터 그는 본격적으로 신문화를 체험하기 시작한다. 학교에서 배우는 명확한 음계의 유럽 노래는 무엇보다도 어린 윤이상의 마음을 끌었다. 그는 음악에 뛰어난 재능을 보였는데, 풍금반주에 맞추어 부르는 창가(唱歌)의 수재였고, 독보력 또한 특출했다고 한다. 집 근처의 교회에서 불려지던 찬송가도 윤이상이 어린시절 경험한 서양음악의 하나였다. 그는 열세 살 때에 바이올린과 기타를 배우고, 연주하며 직접 선율도 써본다. 이때 그가 만든 선율이 통영의 무성영화를 상영하던 영화간의 막간에 행해지는 음악 연주회에서 그 자신도 모르는 사이 편곡 연주되고 있었고, 우연히 자신의 음악이 연주되는 것을 듣게 된 윤이상은 작곡가가 되기를 꿈꾼다.
보통학교를 졸업한 윤이상은 음악가가 되는 것을 반대하는 아버지의 희망에 따라 통영협성상업학교에 진학하여 2년간 수료한다. 그러나 그는 음악에의 꿈을 버리지 못하고 아버지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열일곱 살에 서울로 올라간다. 그는 2년 동안 그곳에 머무르며 군악대 출신의 한 바이올리니스트로부터 화성학을 공부한다. 또한 국립도서관 에 소장된 총보를 이용하여 독학으로 고전음악과 R. 슈트라우스, 힌데미트 등의 음악도 공부한다.
1935년 다시 통영으로 내려온 윤이상은 상업학교에 진학할 경우 음악을 공부해도 좋다는 아버지의 허락을 받고 일본으로 건너간다. 그는 일본 오사카에 있는 상업학교에 입학하고, 오사카 음악학원에 다니며 작곡과 음악이론 및 첼로를 공부한다. 오사카에서 공부하는 동안 강제 징용된 조선인들이 사는 지역에 거주하면서 그는 여기서 억압 받는 동포들의 삶을 보게 되고, 이로 인해 사회적, 정치적 의식에 눈을 뜨게 된다. 한국으로 귀국한 윤이상은 1937년 민족의식이 강한 통영 산양면의 화양학원(지금의 화양초등학교)에서 교편을 잡는다. 이 시기에 그는 오페라의 문헌을 연구하고 작곡을 계속하며 첫 동요집 을 출판한다. 1939년 그는 다시 일본 도쿄로 건너가 프랑스의 파리 국립고등음악원에서 유학한 이케노우치 도모치로에게서 대위업과 작곡을 공부한다.
1941년 태평양전쟁이 시작될 기운이 보이자 고향으로 돌아온다. 태평양 전쟁이 시작되자 그는 징용되어 미곡창고에서 일하게 된다. 반면에 그는 지하그룹을 조직하여 항일할동을 도모하다 1944년 일본경찰에 체포되어 고문당하고 두 달간의 감옥생활을 한다. 석방 후 그는 다시 저항활동을 도모했고, 이를 알게 된 일본경찰을 피해 서울로 도피한다. 결핵으로 쓰러져 경성제대(서울대학)병원에 입원 중이던 그는 그곳에서 해방을 맞이한다.
해방 후 고향으로 돌아온 윤이상은 통영의 문화 예술인들(시 인 유치환, 김춘수, 김상옥, 작곡가 정윤주 등)과 함께 민족문화 창출을 목적으로 '통영문화협회' 를 설립하고, 음악부문을 주도해 나간다.
이 기간 동안 윤이상은 통영의 거의 모든 학교의 교가를 작곡한다. 그러다가 일본에서 부산으로 몰려드는 전쟁고아들에 대한 얘기를 듣고 부산시립고아원의 소장이 되어 이들을 교육하고 보살핀다.
1948년 통영여자고등학교 음악교사가 되고, 얼마 되지 않아 부산사범학교로 옮긴다. 그는 음악을 가르치고 가곡과 현악4중주 등을 작곡하면서 활발한 음악활동을 전개하며, 1949년에는 다섯 개의 가곡을 한데 묶은 초기 가곡집 「달무리」를 부산에서 출판한다.
윤이상은 같은 학교 국어교사인 이수자(李水子 1927-)와 1950년 1월 30일 결혼한다. 얼마 되지 않아 한국전쟁이 일어나고, 그 해 11월 첫 딸 정이 출생한다.
1950년에 부산에서 조직된 '전시작곡가협회' 에 가입하여 활동하고, 1951년 부산고등학교에서 음악교사를 지내다가 1953년 휴전협정 후 가족과 함께 서울로 이주한다.
해방 후 고향으로 돌아온 윤이상은 통영의 문화 예술인들(시 인 유치환, 김춘수, 김상옥, 작곡가 정윤주 등)과 함께 민족문화 창출을 목적으로 '통영문화협회' 를 설립하고, 음악부문을 주도해 나간다.
이 기간 동안 윤이상은 통영의 거의 모든 학교의 교가를 작곡한다. 그러다가 일본에서 부산으로 몰려드는 전쟁고아들에 대한 얘기를 듣고 부산시립고아원의 소장이 되어 이들을 교육하고 보살핀다.
1948년 통영여자고등학교 음악교사가 되고, 얼마 되지 않아 부산사범학교로 옮긴다. 그는 음악을 가르치고 가곡과 현악4중주 등을 작곡하면서 활발한 음악활동을 전개하며, 1949년에는 다섯 개의 가곡을 한데 묶은 초기 가곡집 「달무리」를 부산에서 출판한다.
윤이상은 같은 학교 국어교사인 이수자(李水子 1927-)와 1950년 1월 30일 결혼한다. 얼마 되지 않아 한국전쟁이 일어나고, 그 해 11월 첫 딸 정이 출생한다.
1950년에 부산에서 조직된 '전시작곡가협회' 에 가입하여 활동하고, 1951년 부산고등학교에서 음악교사를 지내다가 1953년 휴전협정 후 가족과 함께 서울로 이주한다.
3년의 유학계획을 세우고 1956년 6월 파리에 도착한 윤이상은 파리 국립고등음악원에서 피에르 르벨(Pierre Revel)에게서 음악이론을, 토니 오뱅(Tony Aubin)에게서 작곡을 공부한다. 유럽에서 최신의 작곡기법을 배우기 원했던 그는 그러나 파리의 보수적인 음악 전통과, 작곡가들의 작품에서 이질감을 느끼며 방황한다.
그는 1957년 8월 독일 (서)세를린 음악대학으로 옮기고, 라인하르 슈바르츠-쉴링 (Reinhard Schwarz-Schilling)에게서 음악이론(대위법과 푸가)을, 쇤베르크(Arnold Schoenberg)의 제자인 요세프 루퍼 (Josef Rufer)에게서 빈 학파의 12음기법을, 보리스 블라허(Boris Blacher)에게서 작곡을 공부한다. 또한 그는 당시 유럽 현대음악의 메카인 독일 다름슈타트 국제하기강습회(Darmstadter Ferienkurse)에 1958년부터 매년 정기적으로 참가하며 유럽 아방가르드 작곡가들 (슈톡하우젠, 노노, 불레즈, 마데르나, 케이지리게티, 펜데레츠키, K. 후버, 카스틸리오니, 체르하 등)과 활발하게 교류한다.
윤이상은 그들의 실험적이고 다채로운 방향의 작품에서 매혹과 충격을 동시에 느끼며, 모든 가능성들에 대해 자유롭게 열려있는 현대음악의 조류속에서 자신의 정체성과 독창성을 보장해줄 음악언어를 찾아간다.
1959년 9월 그의 유럽에서의 첫 작품인 <피아노를 위한 다섯 개의 소품(Funf Stuckefur Klavier, 1958)>과 <일곱 악기를 위함 음악(Musik fur sieben Instrumente, 1959)> 이 각각 네덜란드 빌트호벤 (Bilthoven)과 독일 다름슈타트에서 성공적으로 초연되어 윤이상은 유럽 현대음악계의 주목을 받기 시작한다. 이미 그 해 7월에 베를린 음악대학을 졸업하고 귀국을 준비해 놓은 그는 이 작품들의 예기치 않은 성공을 계기로 독일에 좀 더 머물며 작곡가로서의 자신의 위치를 유럽무대에서 확고히 할 결심을 한다.
프라이부르크(Freiburg, 1960)와 쾰른(Koln, 1963)을 거쳐 윤이상은 1964년 미국 포드재단의 장학생으로 선발되어 (서)베를린에 정착하게 된다. 그 사이 부인 이수자 여사가 1961년 독일로 오고, 두 자녀들도 1964년 베를린으로 오게 되어, 가족이 모두 8년 만에 다시 한자리에 모이게 된다.
그는 1966년 10월 국제적인 음악제인 독일 도나우에싱엔(Donaueshingen) 음악제에서 초연된 관연악곡 <예약(Reak, 1966)>의 큰 성공으로 국제적인 작곡가로서 자리매김하게 된다.
윤이상은 아직까지도 그 진상이 밝혀지지 않은, 소위 '동베를린 간첩단사건' 에 연루되어 한국 중앙정보부원들에 의해 베를린에서 서울로 납치된다. 부인과 함께 간첩혐의로 기소되어 지독한 고문을 받고, 제1심에서 종신형을 선고 받는다. 부인은 5년형을 받았으나 집행유예로 석방된다.
윤이상은 제2심에서 15년형을, 제3심에서 10 년형을 선고 받지만, 독일의 그의 친구들과 국제적인 예술인, 지식인들의 적극적인 항의 및 독일정부의 조력 등에 힘입어 1969년 2월 25일 대통령 특사의 형식으로 석방된다.
서울에서의 구금생활동안 윤이상은 작곡을 허락 받아 세 개의 작품을 쓴다. 희극적인 오페라 < 나비의 미망인(Die itwe des Schmetterlings, 1967/68)>, <율(Riul fur Klarinette und Klavier, 1968)>, <영상(Images fur Flote, Oboe, Violine und Violoncello, 1968)>이 죽을지도 살지도 모르는 인간의 극한 상황 속에서 쓰인 그의 작품들이다.
특히 <영상>은 북한에 있는 고구려 시대의 벽화 <사신도>를 직접 보고 영감을 얻어 쓴 작품으로서, 그는 이 예술작품을 보기 위하여 1963년 북한을 여행했고, 이 북한여행이 바로 그의 간첩혐의를 초래케 한 것이다. 몸은 가둘 수 있지만, 인간의 영혼과 정신은 가둘 수 없다는 것을 윤이상은 음악을 창조함으로 보여주고 있다.
1969년 3월 독일로 돌아온 윤이상은 1971년 독일 국적을 취득하고 망명자로서의 삶을 살아간다. 하노버 음악대학에 출강하며(1969-70) 백병동, 강석희, 김정길, 최인찬에게 작곡을 가르친다. (이들은 윤이상의 유일한 한국의 제자들로서 귀국 후 한국의 현대 음악계를 주도하며 많은 작곡가들을 배출시킨다.)
1972년에 자신이 졸업한 베를린 음악대학의 명예교수가 되고, 1977년부터 정교수로 재직하며 많은 국제적인 제자들을 길러내고 1985년 정년퇴직한다.
한편 평양에 '윤이상음악연구소'가 설립된 1984년부터 북한음악계의 질적 향상을 위하여 강의하며 악기연주기법을 지도하고 유럽의 고전 · 현대음악의 악보 및 CD 등을 지원하는 등 물심양면으로 헌신한다. 또한 북한연주단의 국제적인교류를 위하여도 정력을 쏟는다.
그의 노력으로 북한의 국립교향악단은 1986년 폴란드의 바르샤바 현대음악축제에 윤이상의 작품을 포함한 프로그램으로 참가하여 성공적인 순회공연을 하였고, 이 후 다른 나라에서의 초청도 잇따르게 된다.
이후 그의 창작세계는 겉으로는 점점 독일 음악의 전통에 동화되어 가는 것처럼 보이지만, 그 내면에는 더욱 더 자신의 생득적 토대를 드러내는 모순적 방법을 취한다. 그는 '동베를린사건'에서 겪은 자신의 인간적, 정치적 체험을 보편화시켜 보다 높은 인간성을 추구하며, 이러한 주제들을 그의 작품을 통해 형상화시키는데 주력한다.
그의 <첼로 협주곡(1975/76)>으로 시작되는 일련의 협주곡들과 1980년대의 5개의 교향곡 등은 전 인류를 향해 이러한 그의 메시지를 강하게 전달하고 있는 대표적인 작품들이다.
교육과 왕성한 작품 활동 가운데서도 윤이상은 1973년 한국정부의 김대중 납치사건을 계기로 해외 민주화운동에 투신한다. 그는 '한민련(해외한국인민주통일연합)' 유럽본부 의장, '법민련 (조국통일범민족연합)' 해외본부 의장 등을 맡으며 생을 마감할 때까지 적극적으로 한국의 민주화와 민족통일을 위해 자신의 삶을 헌신한다.
또한 1988년 휴전선상에서의 민족합동음악축전' 을 남북한 정부에 제안하여 음악을 통해 분단된 민족의 화해를 끌어내려 노력했으며, 그 결과 1990년 분단 45 년 만에 처음으로 남북한 음악인들이 함께하는 역사적인 '법민족음악회 (1990년 3월, 평양)' 와 '90년 송년통일전통음악회(1990년 12월, 서울)' 가 성사된다.
윤이상은 함부르크 자유예술원(Freie A kademie der Kunste Hamburg)과 베를린 예술원(Akademie der Kunste berlin)의 회원 및 국제현대음악협회(GNM)의 명예회원으로 활동했다. 그는 Academia Scientiarum et Artium Europaea 회원이었으며(1994), 독일 킬(Kiel) 시(市)가 수여하는 '킬 문화상' 을 수상했고(1971), 튀빙겐 (Tubingen) 대학에서 명예철학박사 학위를수여 받았다. (1985). 1987년 리하르트 폰 바이체커 (Richard von Weizacker) 대통령으로부터 '독일연방공화국 대공로훈장(Groβes Bundesverdienstkreuz)'을 수여받은 그는 함부르크 자유예술원(Freie Akademia der Kunste Hamburg)의 'Thomas-Mann-Plakette'(1992) 및 '괴테-메달'(1995)을 수상했다. 그의 사후인 1996년, 윤이상은 늦봄 문익환 목사 추모사업의 하나로 제정된 제1회 '늦봄통일상' 수장자로 선정되었다.
윤이상은 1995년 11월 3일 베를린에서 78세의 일기로 생을 마감하고, 그가 반평생을 살았던 그 곳에 묻혀있다. 우주의 영원한평화가 이 세계에 실현되는 것, 순수성과 인간성의 회복, 그것이 바로 그의 삶과 음악이 추구했던 이상향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