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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곡가 윤이상작품세계

“동/서양음악의 중개자’
세계 현대 음악사에서 높이 평가받고 있는 한국의 작곡가 윤이상
'동 · 서양 음악의 중개자'로 세계 현대 음악사에서 높이 평가받고 있는 한국의 작곡가이다.
그가 유럽에서 작곡한 100곡이 넘는 다양한 장르의 작품들은 동아시아의 사상과 문화적 전통 및 한국 전통음악의
음향관을 토대로 유럽의 음악매체와 현대 작곡기법을 이용하여 새롭고 독창적인 음악언어로 그의 개성적인 양식을 창조했다.
About him
인트로

“동/서양음악의 중개자’로 세계 현대 음악사에서 높이 평가받고 있는
한국의 작곡가윤이상(尹伊桑 1917-1995)

'동 · 서양 음악의 중개자'로 세계 현대 음악사에서 높이 평가받고 있는 한국의 작곡가이다. 그가 유럽에서 작곡한 100곡이 넘는 다양한 장르의 작품들은 동아시아의 사상과 문화적 전통 및 한국 전통음악의 음향관을 토대로 하고 있다. 윤이상은 이를 유럽의 음악매체와 현대 작곡기법을 이용하여 새롭고 독창적인 음악언어로 형상화하여 그의 개성적인 양식을 창조했다. 서로 다른 두 문화의 상호영향관계를 통한 창조적인 긴장관계 속에서 탄생한 그의 음악언어는 궁극적으로 대립의 세계를 넘어서는 새로운 통일성을 지향한다.

윤이상은 음렬음익이 퇴조되고 새로운 작곡방향이 모색되던 시기인 1950년대 말 유럽 음악계에 등장한다. 당시 유럽의 아방가르드 음악계는 극동아시아의 이름도 잘 알려지지 않은 나라에서 온 한국인 윤이상이 자신의 문화적 뿌리를 포기하지 않고도 그의 작곡방식을 발전시킬 수 있는 개방적인 방향으로 흐르고 있었다.

"다행히 지금 최전선에서는 마치 동양의 수묵화처럼 연한 허무감과 침묵이 흐르는, 그러면서도 섬세하고 미학적으로 교묘히 구축된 그런 작품이 유행하고 있소." (윤이상의 편지, 1958) 윤이상은 빈 악파의 12음기법을 비롯한 유럽의 작곡기법과 표현기술을 철저하게 연마하고, 1958년부터 참석하기 시작한 다름슈타트 '국제하기강습회(Darmstadter Ferienkurse)를 통해 슈독하우젠, 노노, 불레즈, 마데르나, 존 케이지 등 아방가르드 작곡가들과 활발하게 교류하며 현대음악의 정체와 흐름을 파악해나간다.

동시에 그는 자신의 정체성을 보장해 주면서 작곡가로서의 자신의 위치를 그곳에서 확고히 할 수 있는 고유한 음악어법의 발견을 위해 심혈을 기울인다. 1959년 9월 자유로운 12음기법에 의한 그의 초기 작품인「일곱 악기를 위한 음악」(Musik fur sieben Instrumente, 1959)과 「피아노를 위한 다섯 개의 소품」(Funf Stucke fur Klavier, 1958)이 독일 다름슈타트와 네덜란드 빌토벤에서 잇따라 성공적으로 초연되며 윤이상은 유럽에서의 첫 성공을 거두게 된다.

특히「일곱 악기를 위한 음악」의 제2악장의 시작 부분에서 윤이상은 처음으로 한국 전통음악의 길게 끄는 음의 자연스러운 비브라토 연주방식을 지시하고 있다. 이것은 이후 그의 음악의 개성적 양식을 특징 지어주는 작곡방식인 '주요음'- (Hauptton-)및 '주요음향기법(Hauptklangtechnik)으로 발전한다.

초반부터 윤이상은 리게티(Gyory Ligeti)와 펜데레츠키(Krzysztof Penderecki)에 의해 개발되어 이후 70년대 초반까지 유럽 현대음악의 흐름을 주도하는 작곡방식인 '음향작곡(Klangkomposition)의 흐름에 합류하며 그 흐름 속에서 자신의 음악어법을 모색한다. 「바라」(Orchesterstuck Bara, 1960),「교향적 정경」(Symphonische Szene fur großes Orchester, 1960), 「교착적 음향」(Colliides sonores fur Steichorchester, 1961)의 초기 관현악곡은 윤이상이 음향적 측면에 중점을 두고 쓴 실험적 작품들이다. 이 시기 그의 음악의 특징은 주로 한국 전통악기의 독특한 연주기법과 연주방식 등을 유럽의 악기로 표현하여 만들어 내는 독특한 음향구조에 있다. 예를 들어 현악 오케스트라를 위한「교착적 음향」은 각 악장의 제목이 암시하듯이 해금, 거문고, 양금을 그가 형상화하려는 음향의 표현모델로 삼고 있는 작품이다.

위에 언급한 윤이상의 '주요음기법'은 그가 서양 음악과는 전혀 다른 동양음악의 음 개념에 착안하여 이것을 유럽의 현대 작곡기법으로 형상화하여 개발시킨 윤이상 고유의 작곡기법으로서 그의 음악언어의 토대가 된다. 그는 자신의 음악의 토대가 되는 동아시아적 음관념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한다. "유럽음악에서 음이라는 것은 그것이 다른 음과 연결되어 이어짐으로써 비로소 생명을 얻게 되고 개별음은 비교적 추상적으로 머물러 있는 반면, 우리의 개별음은 그 자체가 이미 살아 있는 음이다.

서양의 음을 소묘연필로 그은 선에 비유한다면 우리의 음은 붓으로 그은 선에 비유할 수 있다.
모든 음은 시작부터 사라질 때까지 변화를 거듭하여, 장식, 앞꾸밈음, 파상적 미끄러짐, 글리산도와 음량의 변화를 두루 거치는데, 무엇보다도 각 음의 자연스러운 비브라토가 형상화의 수단으로서 의식적으로 사용된다. 하나의 음에서 음고가 변화하게 될 때, 이 변화는 선율을 형성하는 음정들로 간주되기보다는 장식기능으로, 그리고 한 음의 여러 부분적 표현들로 파악된다." (윤이상 1965)

서양의 음을 소묘연필로 그은 선에 비유한다면 우리의 음은 붓으로 그은 선에 비유할 수 있다. 모든 음은 시작부터 사라질 때까지 변화를 거듭하여, 장식, 앞꾸밈음, 파상적 미끄러짐, 글리산도와 음량의 변화를 두루 거치는데, 무엇보다도 각 음의 자연스러운 비브라토가 형상화의 수단으로서 의식적으로 사용된다. 하나의 음에서 음고가 변화하게 될 때, 이 변화는 선율을 형성하는 음정들로 간주되기보다는 장식기능으로, 그리고 한 음의 여러 부분적 표현들로 파악된다." (윤이상 1965)

윤이상의 이 작곡방식은 그의 작품「가사」(Gasa fur Violine und Klavier, 1963)와「가락」(Garak fur Flote und Klavier, 1963)에서 뚜렷하게 나타난다. 윤이상이 60년대 초반부터 발전시켜온 '주요음-' 및 '주요음향기법'의 완성과 절정을 이루는 작품은 1966년 10월 도나우에싱겐 (Donaueschingen)에서의 성공적인 초연으로 그에게 국제적인 명성을 가져다 준 관현악곡「예악」(Reak fur großes Orchester, 1966)이다. 1970년대 초반까지의 윤이상의 유럽에서의 첫 번째 창작시기는 '음향작곡' 의 흐름 속에서 한국의 전통표현과 유럽의 현대기법을 결합하여 '주요음(향)기법' 을 정립하고, 발전시켜 완성시킨 시기라고 할 수 있다. 1965년에서 1972년 사이에 작곡된 윤이상의 총 네 편의 오페라도 이 시기에 속하는 것으로, 모두가 동아시아적인 소재를 다루고 있다.

대략 1972년「협주적 음형들」(Konzertante Figuren fur kleines Orchester, 1972)에서부터 윤이상의 작곡기법의 변화가 시작된다. 그때까지 윤이상이 한국의 전통과 유럽의 현대와의 결합에 관심이 있었다고 말한다면, 윤이상은 이제 유럽 전통에의 접근과정에서 그의 표현 가능성을 발견하는데 관심을 기울이기 시작한다. 이 과정에서 그는 좀 더 명확하고 이해하기 쉬운 음악언어로 청중들을 향해 나아가 그들과 대화하고 또한 자신의 '동베를린사건' 으로 겪은 인간적, 정치적 경험을 보편화시켜 분명하게 표현하려는 입장을 취한다. 그의 '음향작곡' 시대의 작품이 내부적으로 유동하는 음행복합체로 이루어진 전체음향의 동시적이고 정적인 선적 진행양상을 띠고 있는데 반해 이제 윤이상은 각 악기군을 분산시켜 대립하는 음향세계의 역동성을 표현하는데 그의 관심을 집중시킨다.

또한 그의 음악의 명료성을 위해 3도구성 화음 등 협화적 음향들의 선호, '주요음'의 선율적 성격의 확대, 명확한 형식구조 등을 통하여 아방가르드 적인 음악어법을 완화시켜 나간다. 그의 첫 협주곡인 첼로 협주곡 (Konzert fur Violoncello und Orchester, 1975/76)은 자서전적인 내용의 작품으로 첼로는 개별적 존재를, 오케스트라는 그를 둘러싼 주위세계를 형상화하고 있다. 이 작품에서부터 의미를 갖기 시작한 음과 악기의 상징성, 수사적 어법, 극적 구상 등은 이어지는 협주곡 작곡을 통하여 더욱 더 구체화되어 그의 교향곡으로 이어진다.

한국의 정치적 상황과 민족의 분단 및 통일의 문제를 직접적으로 다룬 그의 작품들로는 오보에, 하프, 소관현악을 위한「이중협주곡」(Doppelkonzert fur Oboe und Harfe mit kleinem Orchester, 1977), 관현악곡「광주여 영원히!」(Exemplumin memoriam Kwangjui, 1981), 교성곡「나의땀, 나의 민족이여!」1987),「화염속의 천사」와「에필로그」(Engelin Flammen. Memento fur Orchester mit Epilog fur Sopran, dreistimmigen Frauenchor und funf Instrumente, 1994)가 있다
윤이상의 마지막 작품인「화염속의 천사」와「에필로그」는 나라와 민족을 위해 분신자살한 한국 학생들의 행동과 죽음을 기록하고 있는 작품이다. 독립적으로도 연주할 수 있는 「에필로그」는 하늘로 올라간 영혼들이 듣는 우주적 음의 세계를 형상화하고 있다. 이로써 윤이상의 음악은 그의 음악의 근원인 우주 공간에 항상 흐르며 존재하는 음향의 세계로 돌아간다.

Orientalism
동양사상

“도교적 원칙들을 추구한다는 점에서
저의 곡들은 도의 표현입니다.”
저의 예술직업은 저의 태생에 맞게 주로 아시아의 철학에서 자양을 취해왔습니다. 그것은 제 음향기법이 동아시아적 음향광에 바탕을 두고 있기 때문입니다.
윤이상 음악의 기본사상

동아시아의 음악관과 유럽 음악의 예술적 융합으로 이해된다. 윤이상 스스로도 자신의 음악이 동양적 사상에 근거한다는 것을 여러 글에서 뚜렷이 피력하였고, 일반적으로 그의 음악양식은 이러한 시각에서 설명된다. 도대체 윤이상의 음악에 영향을 미친 동양적 사상은 무엇일까? 그의 작품과 글을 토대로 할 때 윤이상에 영향을 미친 또는 윤이상 음악세계에서 근간을 이루는 동양적 요소는 한국의 민속음악, 한국과 중국의 궁정음악, 도교와 불교사상 등 다양하다.

그 가운데에서 무엇보다도 윤이상의 음악에서 중요한 의미를 갖는 것으로 도교와 불교를 꼽을 수 있다. 윤이상은 자신의 음악적 근간을 도교사상과 관련하여 많이 언급하였다. 윤리와 도덕성을 근간으로 하는 유교보다는 사람과 우주가 하나의 커다란 완전함 속에 존재한다고 보는 도교 정신에 더 많은 관심을 보였던 윤이상은 이러한 사상을 자신의 음악에 연결시켰다.

도교에서 추구하는 <도道>란 근본적으로 형이상학적이고 우주적인 의미를 갖는 것으로 분석과 정의의 대상이 아니라 직관과 체험의 영역으로 이해된다. 이러한 사상은 도교적인 진지한 교훈극이라 할 수 있는 오페라 <유통의 꿈>이나, 장자의 깊고 철학적인 이야기에 기초한 <나비의 미망인>에서 구체적으로 표현되었다. 도교 사상에서 특히 윤이상에 직접적 영향을 미친 것은 "움직이지 않음 속의 움직임", 즉 정중동 사상이다. 윤이상은 노자와 장자 사상에서 나타나 이 독특한 변화의 개념에 특히 많은 관심을 보였다.

이제는 음악에서의 도교의 가르침인 '움직이지 않음 속의 움직임'에 대해서 이야기하겠습니다. 노자는... 짧은 것은 짧지 않고, 긴 것은 길지 않으며, 뜨거운 것은 뜨겁지 않다고 했는데, 이것은 '도'입니다. 나는 이러한 도교사상의 훌륭한 특성을 기반으로 나의 음악을 만들었는데, 이것은 바로 '움직이지 않음 속의 움직임'입니다.

즉 끊임없이 변화하면서 그 자체는 변함이 없는 <도>의 흐름을 윤이상은 자신의 음악에서 추구하였고, 이러한 특성은 <중신 음향 법칙>과 윤이상 음악 특유의 흐름에서 찾아볼 수 있다. 중심 음향 법칙은 하나의 음이나 음 그룹을 중심으로 음악이 진행되고, 그 중심음이 다양한 변화음으로 장식되는 것을 지칭한다.

작곡원칙은 - 윤이상을 논하는 대부분의 책자에서 인용되는- 다음의 설명에서 드러나듯이, 도교사상에 근거한 것이다

유럽음악에서 음 하나하나는 추상적인 의미를 갖고, 음들의 연속이 비로소 어떤 의미를 획득한다. 그러나 우리 음악에서는 <음> 그 자체가 이미 고유한 의미를 갖고 있다.

우리 음악에 음은 붓글씨의 필체와 비교할 수 있다. 시작부터 마지막 여운까지 모든 음은 <변화>속에서 존재한다. 그것은 장식이나 선취음, 진동, 글리산도 그리고 강세의 변화로 장식되어 있다. 모든 음의 자연스러운 변형은 음고의 관점에서 선율을 형성하는 음정으로 이해되기 보다는 장식적 기능으로 그리고 동일한 음의 부분으로 이해된다.

유럽음악에서 음 하나하나는 추상적인 의미를 갖고, 음들의 연속이 비로소 어떤 의미를 획득한다. 그러나 우리 음악에서는 <음> 그 자체가 이미 고유한 의미를 갖고 있다. 우리 음악에 음은 붓글씨의 필체와 비교할 수 있다. 시작부터 마지막 여운까지 모든 음은 <변화>속에서 존재한다. 그것은 장식이나 선취음, 진동, 글리산도 그리고 강세의 변화로 장식되어 있다. 모든 음의 자연스러운 변형은 음고의 관점에서 선율을 형성하는 음정으로 이해되기 보다는 장식적 기능으로 그리고 동일한 음의 부분으로 이해된다.

윤이상에 있어서 중심음 법칙

"작곡기술적으로 동아시아적 음악언어와 유럽의 아방가르드적 음악언어와의 융해 과정의 핵심"이다. <예악>, <플루트 연습곡> 등에서 나타나듯이 음악적 흐름은 매우 서서히 진행되며, 그렇지만 그것은 결코 정지상태의 인상을 주지 않는다. "오히려 개별음은 그것이 울리기 시작하는 순간부터 울림이 사라질 때까지, 제가 도교적 의미에서 유전과정이라고 일컫고 싶은 어떤 변화 원칙들에 따르고 있는 것입니다. 앞꾸밈음, 장식음, 글리산도, 진동, 음색과 음의 셈여림에서 나타나는 농담효과 등, 이러한 것들은 음과 양의 원칙들이 정태적 또는 고무적 요소들로서 작용하는 한 과정을 이루는 부분입니다.

유전이라는 도교적 개념은 끊임없는 변화를 지향한다는 뜻입니다. 그리하여 개별음은 이것이 울리는 순간부터 이미 앞으로 그것이 계속 펼쳐나갈 기능적 양태들을 자체 속에 담고 있는 것이고, 그것이 실제로 전개되어 나감으로써 언어적 성격을 띠게 되며 그로써 (소우주로서의) 세부에서 (대우주로서의) 전체를 반영하게 됩니다." 중심은 법칙에 의한 윤이상 음악은 작곡기법적으로 볼 때 폴리포니를 연상시킬 수 있지만, 윤이상은 그렇게 보지 않는다. "처음에는 그렇게 보이더라도 나는 [내음악이] 다성음악은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원칙적으로 이 음악은 단원적, 즉 한줄기로 흐르지만, 여러 성부들의 부딪혀 만남과 악기군들의 역할교환등으로 다양하게 느껴지고 폴라포니의 착각을 일으키게 합니다. 즉 이 음악은 헤테로포니적이며 동양적인 의미에서 우연에 의한 함께 울림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불교적 뿌리에 대해서는 도교에 비해서 언급이 적지만, 윤이상은 여기서 많은 음악적 소재를 가져왔다. 그가 유럽에서 최초로 작곡한 관현악곡 <바라> (1960)는 불교 춤에 사용되는 타악기 바라와 연결된 작품으로, 이 작품에 대해 윤이상은 스위스 베른 (Bem) 라디오 방송국에서 다음과 같이 설명하였다. "여러분은 정규의 무용음악을 기대하지 말고, 어떤 불교 사원의 신비적이고 명상적인 분위기를 머릿속에 떠올려 주십시오. 그 사원에서는 승려나 여승들이 악마를 쫓는 춤이나 기도의 춤을 추면서, 극도로 정신을 집중시켜 긴장한, 아주 완만한 움직임을 취하면서 서서히 법열경으로 들어가는 것입니다. 명상적인 편안함과 법열의 긴장이라는 두 가지를, 당신들은 나의 오케스트라를 위한 작품 <바라>의 첫째 마디에서 만나게 됩니다."

<연꽃 속의 진주>(1964)는 티베트에서 주로 사용하는 염불을 기초로 작곡한 곡으로 " 이 곡 전체에서는 소프라노가 제자의 묻는 소리, 바리톤이 스승의 답하는 소리, 합창이 찬동하고 기도하는 '생생하게 살아있는 것 모두'의 소리"를 상징하며, "열반에서의 인간이 완전한 해탈에서 일어나는 듯한, 최고의 청정을 표현" 하려 한 것이라고 작곡 의도를 밝혔다.

Cosmology
우주론

이러한 우주론적 사상에서 서양적 개념과는 다른
아름다움의 사상이 생겨난다.
내 음악은 우주의 큰 힘, 눈에 보이지 않는 큰 힘에 의해서 이루어진 것입니다.
내 음악은 내 개인의 것이 아닙니다.

내 음악은 내 개인의 것이 아닙니다.

"내 음악은 우주의 큰 힘, 눈에 보이지 않는 큰 힘에 의해서 이루어진 것입니다. 우주에는 음악이 흐릅니다. 이 흐르는 우주의 음악을 내 예민한 귀를 통해 내놓을 뿐입니다. 동양의 예술가들은 이름을 밝히지 않습니다. 자기가 지은 작품이라고 자기 이름을 밝히지 않습니다. 예술이란 인간의 소유가 아니라는 사상에서 비롯됩니다. 서양사람들은 자기의 이름을 붙이지만, 어디 예술이 개인 것입니까, 이 우주의 흐름이지요"

서양적 식가와 구별되어 윤이상의 음악에 내재해 있는 도교 및 불교 등의 다양한 동아시아적인 요소는 보편적으로 우주론적 음악관으로 귀결된다.

"윤이상은 음악을 작곡가 개인의 개성이나 능력의 산물로 보지 않고, 삶의 일부로 그리고 더 나아가 우주의 한 부분으로 생각한다. 동양의 음악가들은 음을 공간으로부터 각자 자기의 방법으로 받아들여 음악을 만들어 냅니다. 마치 안테나를 사용하듯 그들은 우주의 음향을 받아들여서, 그들의 특성과 재능을 가지고 음악으로 만들어 내는 것입니다. 이 능력은 음악가들에게만 제한된 것이 아니며, 모든 사람들은 내적으로 직관적인 힘을 지니고 있어, 이러한 힘을 강하게 또는 약하게 느낄 수 있습니다.그러므로 동양 사람들이 말해오기를, 음악이란 작곡하는 것이 아니고 낳는 것과 같다고 했습니다. “우주의 작은 부분이 탄생하는 것입니다."

즉 동양적 사고에 의하면 음악은 우주의 음향을 안테나로 받아 형상화된 것이며, 이렇게 탄생한 작품은 다시 우주의 한 부분으로 회귀한다는 것이다.

즉 아름다움의 관점에서 볼 때 서양에서는 아름다움이 감각적 현상 및 구체적 작품과 연결된 개념이라면, 동양적 아름다움은 우주와의 직관적 합일을 통해 나타난다는 것이다.
이러한 맥락에서 윤이상이 음악에서 추구하는 것은 감각적 측면보다는 정신적, 우주를 조절하여 합성시킨 화성보다는 개별적 음 하나하나를 중요하게 여겼는데, 음 하나하나 안에 완전한 우주가 구현되어 있다고 보기 때문이다.

"서양 음악에서는 화성이 깨끗하게 울리려면 음높이가 맞아야 합니다만, 동양음악에서는 음 자체가 충분히 살아있기 때문에 서양적 의미의 화성이 없습니다. 하나의 음이 울리고 사라지는 과정에서 유연한 움직임을 지니고 있고, 이것이 여러 가지 모습으로 다양하게 나타난다면, 이 음은 이미 하나의 완전한 우주입니다. "

이렇게 우주론적 음악관은 윤이상에게 동양과 서양을 구별하게 하는 중요한 척도가 되었다.

그는 자신의 글에서 이러한 방식으로 동양과 서양을 구별하여 많이 비교하였다. 위의 언급 외에도 윤이상은 서양 음악이 작품을 중심으로 전개된다면, 동양음악은 직관에 의한 음악을 중요시하며, 서양에서는 이원주의적 사고를 중심으로 한 <발전> 개념이 중요하다면, 동양에서는 <보완>이 <변화>를 중심으로 한 흐름을 중요시한다고 윤이상은 이 두 세계를 구별하였다. 이러한 구별은 자신의 음악이 보편적 서양음악과 어떻게 차별화 되는가를 뚜렷이 하기 위한 설명이다. 그렇지만 여기서 중요한 사실은 윤이상이 동양적 음악을 추구 한 것이 아니라는 점이다. 윤이상은 앞서 언급했듯이 이러한 동양적 토대를 서양의 음악에 접목시키고자 하였다.

"저의 작곡방식은 본질적으로 아시아적 음향관계에 뿌리를 두고 있으며 이 아시아적 원칙을 형식으로 완성시키는 수단이 유럽적·무조건적인 것입니다.

그래서 오늘날 저는 저의 음악을 동양의 전통과 서양의 전통과의 부단한 접근과정으로서 만이 아니라 그 들의 상호동화과정으로 이해하고 있습니다. "

서로 다른 이 두 세계를 어떻게 연결시켜 작품으로 형상화하는가의 점은, 현재 윤이상과 관련하여 가장 많이 연구되는 주제 중의 하나로서, 윤이상 음악을 이해하는 핵심 문제이다. 이와 연관하여 <윤이상은 한국적 작곡가인가 유럽적 작곡가인가>라는 문제가 많이 대두되기도 하였다. 윤이상의 대표적 오페라 중의 하나인「심청」에 대해 "어떤 이는 너무나도 서양적이라고 말하고, 어떤 이는 너무나 동양적, 이국적 이라고 하는 정반대의 반응"이 나온다는 말을 듣고 했던 윤이상의 답변은 이러한 문제의 해결에 실마리를 제공해 준다.

즉 윤이상은 동양적인 것과 서양적인 것
모두에 자신을 열어 놓고 있는 것이다.
나의 위치를 각인각색으로 보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래서 좋은 것입니다. 나의 음악은 동양적인 것으로 들을 수도, 서양적인 것으로 들을 수도 있는 것입니다. 그럴 수 있다는 것이 바로 나의 위치를 말하는 것이지요. 나는 전형적인 동아시아인도 아니며 유럽화 된 사람도 아닙니다. 나는 두 문화의 요소를 다 가지고 있습니다. ……나의 몸은 고향을 떠나 서구 세계에 들어와 거기에 정주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서양에서 작곡공부를 또 한 번 처음부터 시작했습니다. 분명 나는 일본과 한국에서 서양음악을 후기 낭만파까지 배웠지만 그때에는 아직 내가 구하고 있던 것을 발견해내지는 못했습니다. 기초부터 배우기 위해 나는 파리와 베를린으로 왔습니다. 그리하여 서구세계에 머물렀지요. 나는 모든 서양문화 및 서양음악과 예술적으로 생사를 걸고 대결하지 않으면 안되었습니다.

서양의 작곡기법까지 배우면 그것으로 서양의 작곡가가 된다."는 것은 옳지 않습니다. 많은 경우, 먼저 자기 자신의 출생을 잊고 새로운 것이나 극히 이질적인 것에 대해 백지(tabula rasa)가 되어야 합니다. 나의 경우는 서양음악을 배우면서 그것과 싸워야 했지요. 그러고 나서 나는 자신이 동양 출신임을 다시 기억해 내야 했습니다. 이리하여 처음으로 나는 나의 내부에 있는 저 동양적인 것, 즉 흐르는 것을 서양의 음악언어로 표현하는 일을 공부하게 되었습니다. …… 그러므로 당신은 잘 아시겠지만 나의 음악이 서양음악인가 아니면 동양음악인가 하는 질문에는 전혀 관심이 없습니다. 나는 내 자신이 쓰지 않으면 안 되는 음악을 쓰고 있는 것이지요."

그리고 그것이 자신의 음악이 가져올 수 있는 독자적인 위치임을 인지하고 있다. 그렇지만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은 윤이상의 여러 텍스트에서는 이 두 영역의 융합 속에서도 자신의 동질성을 동양의 문화권 그리고 한국인으로서 찾고 있다는 사실이다. 그는 자신의 예술적 입지가 도교사상을 비롯한 한민족의 저력에서 나온 것임을 재차 강조하고 있으며, 결코 자신은 유럽인이 될 수 없음을 강조하고 있다.

"'내가 오늘 국제적으로 이름난 작곡가가 되었지만, 이것은 내가 민족의 뛰어난 예술적 전통을 이어 받았기 때문입니다.' 우리 민족은 참으로 훌륭한 예술적 요소를 갖고 있습니다.
우리 민족은 동양의 그 어느 민족들보다도 통할한 도교사상을 가장 구체적으로 보존시키고 있습니다. 우리 음악은 이 전통을 그대로 갖고 있고, 바로 전통 속에서 내가 태어나고 자라났기 때문에 오늘의 내 음악이 존재합니다. 이 전통 문화권 밖에 있었다면 어떻게 나의 음악이 나오겠습니까?' "나는 유럽인들이 이러한 도교적 사상을 이해하고자 노력하는 것을 강하게 느끼지 못했습니다. 그들은 단지 지식으로만 획득합니다. 그렇지만 다른 문화와 접한다는 것, 또는 그러한 방식으로 살고자 시도하는 것은 완전히 다른 것입니다.…… 나는 매일 유럽인들과 아시아인들의 이러한 차이를 체험합니다."

About him
언어성

음악이란 나에게 있어서 신비주의, 사회 그리고 세계관의 표출이었습니다. 그래서 나는 음향만을 가지고 몰두하지 않았습니다.
나의 음악은 다만 지적인 음의 유희가 아닙니다.

"나의 음악은 언어이며, 노래이며, 호소이며, 시이며, 환상이며, 암묵의 극적 세계이려고 의도합니다. 이런 모든 표현요소는 주제가 있고 대상이 있고 또 음악이 날개를 펼 수 있는 공간이 있습니다.
음악이란 나에게 있어서 신비주의, 사회 그리고 세계관의 표출이었습니다. 그래서 나는 음향만을 가지고 몰두하지 않았습니다. "

윤이상에게 음악은 그 무엇과 표현하고 드러내는 일종의 언어이다.
음악의 의미를 음 그 자체에 두는 형식주의적 사고, 예술을 위한 예술이라는 자율미학은 윤이상에게는 낯선 것이었다. 이는 동양음악의 전통과도 관련이 있는 것으로, 동양의 음악은 삶과 자연 속에서 일치되면서 나름대로의 역할과 기능을 하고 있었다. 이러한 동양적 근간과 함께 윤이상 자신은 음악에서 "강한 표현성"을 드러내면서 개성적인 음악 언어를 표출하였다. 윤이상의 작품은 구체적인 주제와 관련이 있는데, 위의 인용에서 언급한 <신비주의>, <사회>, <세계관>은 모두 윤이상의 음악에 형상화되었다. 먼저 <신비주의>는 도교와 불교의 영향과 관련이 있는 것으로, 윤이상은 "지금까지 100곡 이상의 작품을 썼는데, 그 중에서 약 70퍼센트 이상이 도교나 불교적 신비주의에 뿌리를 두었거나 그것과 관련이 있는 설화"라고 설명한다. 예를 들어 <거리>에 대한 윤이상은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하늘까지는 엄청난 거리입니다. 도교적인 관점에서, 하늘에는 영원한 고요와 조화 속에서 우주와 땅과 사람을 움직이고 지배하는 더 높은 곳이 있습니다. 도교의 신비주의에서 이것의 상징은 하늘의 황제인 "옥황상제"입니다. 관악오중주와 현악오중주를 위한 "공간작품(Raumkomposition)"인 <거리>에서는 호른 연주자가 이 옥황상제인데, 그는 현악주자들에게 멀리 떨어져 음악회장의 가장 높은 곳에 앉아 있습니다. 이 근처에는 플루트, 오보에, 클라리넷과 파곳이 위치합니다. 중간 높이에는 제1, 제2바이올린, 무대 아래에는 저음의 현악기가 자리를 잡게 됩니다. 이 저음의 현악기들은 서로 다투고 소리를 지릅니다. 그러나 두 보살인 제1, 제2바이올린 이 인간들을 달래서 우주와 중재시킵니다. …마지막 부분에 가서는 이 우주가 조화 속에서 마무리 되면서 호른의 음향만이 남습니다."

더 나아가 윤이상이 언급했던 <사회>는 그 음악에 나타난 정치적 경향에서 확실하게 드러나며, <세계관>은 1970년대 중반 경부터 그의 음악에 확실하게 자리 잡는다. 정치적 문제로 삶의 위기를 경험한 이후 윤이상은 "사회와 인간성의 탐구"로 전진했고, 다양한 협주곡에서 인간의 문제를 음악적으로 다루면서, 점차 자신의 세계관을 음악과 시켰다.

이러한 경향의 예로는 그의 교향곡을 들을 수 있다.

윤이상의 교향곡 제1번 '제1악장은 공포의 모습을, 핵전쟁의 파괴로 인한 일종의 세계의 종말'을 그리고 있으며, 제4번은 고통 받는 동양의 여성을 위한 작품으로 "불행한 여성들이 잔혹한 현실에 대항해서 희망이 없는 삶에서의 해방을 위해 부르는 노래"를 주제로 하고 있다.
이렇게 무엇인가를 강하게 표현하고자 하는 윤이상의 의도는 그의 작품에 고스란히 담겨졌으며, 그래서 윤이상은 "음향이 강하다" 또는 "언어가 강하다"라는 평을 받고 있다. 이러한 맥락에서 윤이상의 작품은 표제음악적 경향을 보인다. 특히 윤이상이 자신의 작품을 분석하면서, 각 음악적 부분을 구체적 상징이나 언어로 설명할 때, 표제적 특성은 더욱 뚜렷해진다. 그러나 윤이상 스스로는 자신이 표제음악 작곡가라고는 생각하지 않는 듯 하다.

"그러나 내가 앞서 언급했듯이 나는 자연주의적 양직 [즉 대상을 직접 묘사하는 방식]에 의해 작품을 구상하지는 않았습니다. 관념(ldee)은 작곡가의 환상을 음으로 만드는 하나의 자극입니다. 청중이 그것을 알고 싶어 하는가 안하는가는 그들의 자유입니다. 우리는 음악을 그저 단순히 절대음악으로 간주할 수도 있습니다. 나의 작품에는 도교, 불교의 신비주의가…자주 테마가 됩니다. 그러나 이러한 주제적 배경이 나의 작품을 이해하는데 있어서 꼭 필요한 조건은 아닙니다."

즉 윤이상은 음악을 통해 강렬한 메시지를 전달하고자 하였지만, 구체적 주제는 작품을 쓰는데 어떤 출발점을 제공하며, 작곡가의 구체적 출발점을 청중에게 그대로 전달하고자 한 것은 아니었다. 고구려 벽화를 음악적으로 표현한 [영상]의 경우에도 그는 사실적인 묘사보다는 "그 벽화를 직접 정신 속에서, 예술가로서의 거리와 대범한 추상에서 생명으로 깨워보고자" 했다고 말했다.

그 그림이 작곡가의 환상을 자극하여 생겨난 분위기'를 드러내려 했고, 이러한 상황과 그림에 대해 청중에게 무언가를 남도록 시도"했던 것이다. 즉 윤이상은 청중에게 무엇인가를 강하게 말하고자 한다. 그것은 분명하다. 그리고 이런 면에서 다른 작곡가와는 구별되기도 한다.

그러나 그것이 표제적 성격이라기보다는 그가 음악을 통해 추구하는 자신의 세계관이라는 보다 폭 넓고 추상적인 것이다. 특히 그는 자신의 창작 후반기에 들어오면서 <인간성>을 자신의 음악의 화두로 삼았고, 인류에 대한 관심과 사랑을 자신의 음악에 담고자 하였다.

Orientalism
음악과 정치

음악이란 유토피아적 공상에서뿐만 아니라, 사람과 함께 살아야 하며, 또 멀리 있지 않아야 한다.
음악은 때로는 깨어진 뚝배기 속에 선혈(鮮血)을 담아 폭군의 코앞에다 쳐들고 그 선혈을 화염으로 연소시키는 강한 정열을 뿜어야 한다.

윤이상의 삶에서 정치는 떼려야 뗄 수 없는 불가분의 관계에 있었다. 그는 일제 강점기 독립운동을 시도하다가 감옥살이를 하였고, 1967년 제3공화국 시절에는 독일에서 민주화 활동을 하였다가 국가정보원으로부터 조작된 간첩사건에 연루되어 서울로 납치당해 사형선고까지 받았다. 또한 제5공화국 시절에도 민주항쟁과 구명운동을 계속하였다.

이러한 삶의 여정은 당연히 그의 작품에 형상화되었는데, 시기에 따라 점진적인 변화를 보였다. 1960년대 유럽에서의 활동 초기의 작품에는 이러한 경향이 거의 구체화되지 않았다. 그러나 1967년 동베를린 사건 이후 그의 음악세계는 사회적 정치적 메시지를 담기 시작하였고, 80년대 후반 90년대 들어서는 이러한 메시지를 한 단계 높여서 인간에 대한 관심으로 승화시켰다. 음악과 정치에 대한 그의 견해도 이와 비슷한 여정을 거쳤다. 1977년 루이제 린저(L. Rinser)와의 대담에서 윤이상은 "기본적으로 나의 경우에는 예술과 정치는 분리되어 있습니다. 나는 단지 음악가이고 그 이외의 아무 것도 아니며, 그리고 음악가로서 정치와는 직접적으로 아무런 연관도 없습니다."라고 보다 거리감을 표명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1987년의 글에서 "예술을 위한 예술과 경향적(참여) 문화를 가르는 일은 오늘날의 상황에서 극복되어야 한다."고 강조하면서, 이러한 의견에는 '예술이 현실을 중시하고 그 현실 속의 인간주의적 목소리를 부각시켜야 한다는 사실'이 포함되어 있다고 말했다. 그리고 "음악이란 유토피아적 공상에서뿐만 아니라, 사람과 함께 살아야 하며, 또 멀리 있지 않아야 한다."고 역설하면서, 삶과 음악의 거리를 좁히고자 하였다. 또한 1990년대 인터뷰에서는 '단적으로 말해 예술과 사회는 분리될 수 없다'는 입장을 명확하게 말했고, 이를 궁극적으로 인간성에의 호소로 연결시켰다.

"나의 음악언어는 경쾌하지 않습니다. 그것은 차라리 정의를 향한 절규에, 아름다움에의 호소에 더 가깝습니다. 거기에는 억압된 자들을 위한 위로와 외침이 있습니다. 이것은 정치적인 면으로 이해될 것이 아니라 가장 인간적인 면으로 이해되어야 할 것입니다."

음악과 정치와의 관점에서 윤이상의 입장

20세기의 대표적 참여작곡가 아이슬러(H. Eisler)나 노노(L. Nono)의 경우처럼 직접적으로 정치적인 메세지를 담고자 하는 태도와는 구별된다. 이는 아마도 윤이상의 정치적 참여가 도교정신과 연결되어 인간적인 차원에서 승화시키려 노력했던 점에서 그 원인을 찾을 수 있을 것이다. 윤이상은 음악이 '사람의 소유물'이 아니고 "우주적 힘"이기 때문에, 음악을 통해 사람들을 깨우치고자 노력하였고, 후기로 올수록 더욱 뚜렷해지는 <인간적인것>, <인간> 에 대한 연민과 애정은 그의 정치적 성향을 보다 완화적으로 표현하게 하였다. 그렇지만 예외적인 몇몇 작품이 있는데, <광주여 영원히!>, 그리고 그의 마지막 작품 <화염속의 천사>가 여기에 속한다. 이 작품에서 윤이상은 자신의 정치적 메세지를 보다 구체적으로 드러냈다.

윤이상은 <광주여 영원히!>에 대해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내용과 형식의 엄격성이라는 점에서 특이한 자리를 차지하는 작품이 있는데, 관현악곡 <광주여 영원히!> (1980)가 바로 그것입니다. 저는 이 곡을 광주민중항쟁이 잔혹하게 암살 된 데 대한 항의에서 썼습니다. 이 광주 항쟁은 독재자 박정희가 살해된 뒤 일어났고 저의 고국의 민주화의 징표로 여겨지는 해방운동으로서 1980년 5월 박의 뒤를 이어 들어선 정권에 의해 잔인하게 진압되었습니다. 제가 하우스 호퍼(A. Haushofer)와 작스(N. Sacha)의 텍스를 가지고 쓴 칸타타도 … 이와 같은 맥락에 집어넣을 수 있겠습니다. 이러한 곡들은 정치적 음악이라기보다는 오히려 저 자신의 내적 신념에 음악적 표현을 부여하고자 한 시도의 소산이라고 말할 수 있겠습니다."

소프라노, 여성합창 그리고 5대의 악기를 위한 에필로그가 있는 오케스트라를 위한 작품을 일종의 교향시이다. 1995년 4월 5일 윤이상이 운명하기 7개월 전 윤이상 전문가이며 절친한 친구였던 슈파러(W. Sparrer)와의 대담에서 윤이상은 이 작품에 대한 아이디어를 다음과 같이 밝혔다.

"이 곡을 작곡하는 과정에서 나는 현실에서 이미 여러 번 일어났던 하나의 장면을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그것은 자신의 몸에 기름을 붓고 불을 붙인 채 높은 건물에서 떨어지는 모습이었습니다. 그리고 나는 거기서 이 충격적인 사건을 보고 있는 사람들과 그 사회를 생각했습니다. …… 그 배경에는 역사적 발전과 사회적 상황들이 연관되어 있습니다. 노태우 정권의 말기인 1991년 초 나는 한국에서 대부분 학생들로 이루어진 수많은 젊은이들이 지속적으로 시위를 하고 그 시위는 무력으로 무참히 제압되는 것을 보았습니다. ……(그 가운데) 분신으로 자살을 시도한 젊은이들이 있었습니다. 그들은 정치적 용사도 아니었으며, 단지 희망을 찾을 수 없는 것과 민주화와 통일에 대한 염원이 막다른 길에 다다른 것 을 보았을 따름이었습니다. 그들은 또한 사회가 파멸되는 것과 개개인의 무력함을 보았습니다. 그들은 자발적으로 행동하였고, 사회에 하나의 충격을 주기 위하여 그들 스스로의 몸을 불살랐습니다. ……나는 이러한 행위를 나의 음악을 통해 하나의 기념으로서 되새기며, 어떻게 죄 없는 사람들이 그런 사회의 희생자가 되는가에 대한 하나의 예를 제시하는 것이었습니다."

이러한 예에서 드러나듯이 윤이상은 자신의 음악을 통해 정치적 메시지를 그것이 간접적이든 직접적이든 전달하고자 하였다. 그는 항상 "음악으로 인간에게 말을 하고자" 했으며, 사회와 정치에 호소하고 경고하는 의미를 전달하고자 했던 것이다.

Orientalism
창작관

어느 날 순간에 나는 무엇인가를, 어떤 음향의 흐름을 듣습니다.
동양적 사상

특히 도교 사상에 심취했던 윤이상은 어떤 과정을 거쳐 작품을 써나 갔을까? 그의 텍스트를 중심으로 작곡 과정을 추적해 보면, 윤이상은 자신의 주변에서 어떤 자극을 받고 작곡의 모티브를 얻는 듯 하다. 그는 다른 작곡가들처럼 이를 <영감>이라는 개념으로 표현하지는 않았지만, 논리적으로 설명할 수 없는 순간적인 느낌이 그의 창작을 자극하였던 것으로 보인다.

"어느 날 어느 순간에 나는 무엇인가를, 어떤 음향의 흐름을 듣습니다. 나는 그것을 마음의 귀로, 음향의 환상(판타지)속에서 듣는 것이지요. 그것은 어떤 새로운 것입니다. 형식적으로나 내용적으로 보아도 그것은 새로운 문제를 포함하고 있습니다. 허나 곤란한 점은 그것이 들리긴 하지만 아직 형태를 이루지 않고 포착되지 않아서 써낼 수 없다는 것이죠. 하지만 그것은 거기에 있고 또 계속해서 존재하고 있습니다. 그것은 나의 마음속에서 저녁까지 그것과 마주하여 거기에 성립된 것이 조용히 성숙되기까지 몇 년이라도 계속해서 싸우고 싶다고 생각합니다. ……그리하여 나는 머릿속에서, 마음속에서 작품에 착수합니다…."

이러한 창작의 자극에 대해 윤이상은 어린 시절 바다에서 물고기를 잡으며 불렀던 어부의 소리를 회상하며 설명한다.

"어부가 물고기를 보면, 그의 목소리는 흥분되고, 리듬은 빨라졌습니다. 제가 합창 음악을 작곡하면 이러한 기억이 때때로 납니다. 그러한 흥분, 그러한 상승 … 나는 어부의 목소리를 듣습니다. 음악은 이와 같지 않습니다. 그렇지만 내 음악적 세계에서는 (그러한) 어떤 불꽃이 일어납니다."

이러한 불꽃은 자연 풍경 또는 문학 작품에서도 점화된다. 윤이상은 "창문에서 바람에 움직이며, 떨면서 서로 닿는 두 개의 가지"를 보고 바이올린 듀오 작품 <소나티네>를 창작하였고, 신석호의 시 「청산아 말하여라」를 읽고 <플루트 협주곡>의 아이디어를 얻기도 하였다.

나는 해방 전후에 어느 문학잡지에서 신석호의「청산아 말하여라」라는 장시를 읽었다

이 속에 나오는 몽환적인 장면이 내가 이 곡을 작곡할 때 떠올랐다. 즉 젊은 여승이 달빛이 비치는 절간 마당의 석불 앞에서 나체가 되어 춤을 추는 장면이다. 어릴 때 기구한 운명으로 절에 보내어졌으나 나이가 들수록 부풀어 오르는 밤마다의 욕정은 드디어 그녀로 하여금 달밤에 마당으로 뛰쳐나가게 한다. 심야의 달빛에 비치는 부처의 석상은 미소년으로 화한다. 알몸으로 그를 껴안으나 현실은 차디찬 돌이다.

음악은 무(無)에서 시작하여 다시 무로 돌아간다.

무에서 시작하여 이야기 줄거리가 생성되고 아름다운 사찰을 둘러싼 자연 속에서 정열과 명상, 의무와 인간성에 끼인 한 사람의 피와 살이 갈등하고 자문자답한다. 그 동안 관현악은 신비스러운 밤의 자연풍경을 펼쳐나간다. 독주는 절정에 도달하였을 때 카텐차로 "폭발"한다. 이 플루트의 카텐차는 자아를 해탈하여 광란의 도취경에 이른다. 이윽고 현실로 돌아가는 과정에서 처음처럼 알토 플루트로 바뀌며 음악은 … 명상을 통해 무로 돌아간다.

"나는 또 때때로 음악적인 스케치, 일종의 이미지의 속기를 만들고 나서 그것을 넓혀갑니다. 그러나 대부분의 경우에는 나는 작품이 머릿속에 완성되었다고 생각했을 때 허리를 낮추고 쓰기 시작합니다. 그러나 첫 머리에서는 아주 난산합니다. 일단 30내지 40소절이 가능했을 때, 그 다음은 절로 움직이게 됩니다. 그러고 나서는 하루에 6시간, 오전이나 오후, 때로는 하루 내내 일을 합니다. 일이 순조롭게 진행될 때에는 아주 행복하고 날아갈 듯 한 기분이 듭니다. 잘 안되면 절망적으로 됩니다. ……나는 일을 하는 경우에는 책상에 붙어 앉아 있지 않고 걷고 돌아다니며 생각을 짜냅니다. 피아노나 그 밖의 악기로 작곡하는 일은 없지요. …… 중요한 것은 처음의 40소절이 잘 나가는 것입니다. 이 최초의 소절수 속에 작품 전체의 모든 구성요소가 포함되어 있는 것이지요. 만약 처음이 잘 나가면 그 작품은 저절로 이루어져갈 겁니다."

돌아가는 과정에서 처음처럼 알토 플루트로 바뀌며 음악은 … 명상을 통해 무로 돌아간다.

"나는 정신을 집중하여 그것을 몇 번씩이고 시도해봅니다. 그 검토, 진리의 검사에 합격 했을 때(즉 어느 정도 수준이 되었을 때) 비로소 나는 그 앞을 쓰고 그때부터는 아주 빨리 진행됩니다. 소곡, 예를 들어 10분짜리 오케스트라 작품의 경우에는 약 3개월을 요하고, 오페라「심청」의 경우에는 1년이 걸렸습니다." 나는 아주 오랫동안 내 머리의 집중을 필요로 합니다. ……나는 한 주 내내 형상화 작업을 하며, 그것이 명확해지면 바로 쓰기 시작합니다. 물론 시작은 어렵습니다. 10마디, 20마디 계속해서 새롭게 읽고 또 읽으며…, 한 번의 휴식을 포함하여 나는 보통 6~7시간 작업을 합니다."

그런데 이 과정에서 중요한 것은 그가 음악적 재료를 논리적으로 작업하지 않고, 직관에 의존한다는 것이다.

나는 재료를 가지고 음악을 쓰지 않고 직관으로 씁니다.
나는 어떤 선율이나 주제를 쓰지 않습니다.